[칼럼] ‘유연성’이 아니라 ‘유연 안정성’이다(한겨레신문 2008.1.1)
김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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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2:00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노동정책 제1과제로 추진해 왔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은 861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격차는 100 대 50으로 확대되었다. 법정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이 189만명으로 노동자 여덟에 한 사람꼴로 늘어났고, 임금 불평등은 미국보다 심해졌다.
지난달 한 취업사이트가 직장인을 상대로 ‘자녀가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35.4%가 ‘공무원’이라고 답했고, 그 이유로 ‘고용이 안정적이어서’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리고 75.5%가 ‘지금 직업을 자녀에게 권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직장인들이 느끼는 고용불안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공무원 지망 쏠림 현상을 빚어 인적자원 배분에 왜곡이 생길 가능성을 말해준다.
지금은 유연성보다 안정성을 강조할 때다. 그렇지만 지난달 이명박 당선자가 전경련을 방문했을 때, 재벌 총수들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일 것을 주문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경직적이다. 더 많은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신화가 깊숙이 뿌리박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를 뒷받침할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유연하다는 증거만 수두룩하다.
노동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한국의 노동시장은 탄력성·조정속도·변동성·상관성 등 모든 지표에서 미국보다 유연하다. 노동연구원 집계 결과 한국의 고용조정 속도는 60개국 중 9위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 중 1위다. 한국보다 고용조정 속도가 빠른 나라는 홍콩·나이지리아·짐바브웨·파키스탄·인도·스리랑카·말레이시아·세네갈 여덟 나라로 후진국 노동시장이 더 유연하다. 칠레 중앙은행은 18개국 노동시장의 탄력성을 추정한 결과, 한국과 홍콩이 가장 유연하고, 칠레·멕시코·미국이 다음으로 유연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노동시장 유연성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란 ‘경제가 변동할 때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노동시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조응하는가’를 의미한다. 기업은 단기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누릴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만큼 고용불안과 생활불안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경제적 효율성을 가로막고 사회불안마저 야기할 수 있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안정성과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만이 긍정적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유럽연합에서는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시장 유연성과 노동자가 요구하는 안정성의 적절한 균형을 꾀하는 방향에서, 유연 안정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작년 10월에는 유럽연합 노사가 유연 안정성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이들은 노동시장은 유연하지만 사회적 안정성이 낮은 나라는 안정성을 높이고, 노동시장은 경직적이지만 사회적 안정성이 높은 나라는 유연성을 높이며,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고 사회적 안정성이 낮은 나라는 유연성과 안정성 양자를 높일 것을 제안한다. 유연성에는 수량적 유연성, 임금 유연성, 노동시간 유연성, 기능적 유연성이 있고, 안정성에는 직장 안정성, 고용 안정성, 소득 안정성, 결합 안정성이 있으므로, 국가·산업·기업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델이 가능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리고 각국의 노·사·정 3자는 상호 신뢰와 협력에 기초해서 스스로에 적합한 유연 안정성 모델을 도출하고 사회적 합의를 추구할 때만이 유연 안정성 정책은 성공할 수 있다고 권고한다.
이제 우리도 유연성이라는 외발 자전거를 버리고, 유연성과 안정성이라는 두발 자전거로 갈아 탈 때가 되었다. 앞으로 노동시장 정책은 수량적 유연성은 낮추고 기능적 유연성과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에서 운용해야 할 것이다.